어떤 삶의 이야기라고 할까?

1) 아무리 후회해본들 어찌하랴!!!

단해 2017. 5. 28. 23:28

상철이 나이 어언 8학년에 이르러 어린시절 힘들고 고달플 때 그저 주었던 그때의 돈 때문에 그 순간

기분 좋았지만  65여년간의 긴 세월동안 그 업보(業報)로 인해 이렇게 괴롬이 지우지지 않고 갈수록

더 또렸하게 생각나 아무리 후회해 본들 어찌하랴!!!

그로 인해 스스로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며 양심의 울림소리를 평생들어 고통서럽고 아플줄이야...  


그는 현대와 과거에 낀 세대로 8세땐가 2차대전 종말을 보았고 해방된 조국과 6.25민족 전쟁을 비롯해~

지금까지의 정치경제적 우리사회가 변모(變貌)되어 오는걸 직접보며 이 사이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우유곡절끝에 해방된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선거를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간선제(間選制)로 실시되는 것을  지켜보았고 당시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 것은 

우남 이승만박사와 백범 김구선생님과의 대통령선거의 맞대결이었다.

결과는 당시 이승만180표 김구13표로 압도적 표차로 이승만이 김구를 누르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選出)됐음을 똑똑히 나는 지켜봤지!


지금에와서 정치적으로 좌(左)다 우(右)다 하며 보수니 진보니하는 대한민국의 효시점(效示占)이 된 것은, 

이승만(李承晩)은 보수 김구(金九)는 진보로 이 두분이 그런 정치성향(政治性向)의 시조(始祖)가 되어 아마그때부터 태동(胎動)된 우리나라의 현실적 정치적지향(政治的指向)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 이승만은 한반도의 시대적 현실에 따라 우선은 남한(南韓)만이라도 단독 민주정수립을 주장했고

김구는 김일성과 협상해 민족이 하나로 남북통일정부를 주장해 서로의 사상과 시행방법 차이로

두 거두(巨頭)는 국가구성문제(國家構成問題)를 두고 사사건건 대립하고 갈등했다.

김구(金九)는 남북을 오고가며 수차례 김일성을 만나 협의했으나 결과는 북측(北側) 김일성(金日成)의

간계(奸計)에 이용당해 김구(金九)의 이상(理想)은 공산주의 혁명적 배신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걸 보았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꿈나라에 가 있을 새벽3시경 김일성은 대한민국을 

공산화(共産化)시키기 위해 선전포고(宣戰布告)도 없이 기습남침(奇襲南侵)해서 비극적인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밀리고 밀어내는 살육(殺戮)과 파괴(破壞)의 지리한 전쟁와중, 1953년 7월 27일(오전10시경)

남북이 휴전협정을 맺음으로서 삼(3)여년간의 동족살상전쟁(同族殺傷戰爭)은 잠시 휴전되어 지금까지왔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평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장 전쟁도 아닌 엉거주춤 불안한 휴전속에 있음을 우리가

지금은 다 잊고 마치 평화속에 사는 것으로 다들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안보(安保)는 중요하다.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 해도 붉은 사상이 대못으로 밖혀있는 특히 이북식 독재공산주의는 절대로 용납할수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순수한 북한 동포는 예외이지만)


1953년도 휴전협정당시 그때 상철의 나이는 꿈많은 꽃봉오리의 16세정도였을 것이라 했지!

당시 부산은 대한민국 각지에서 피난온 사람들로 비좁은 땅에 발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고 그 시절 세계에서

제일 가난했던 우리나라는 해방당시부터도 모든 국가기반이 별로 있지 않았지만 그나마 몇몇 있는 것도

모두다 파괴돼 농작물을 비롯해 공장생산품 등이 전연 없는 올스톱으로 사막과 같은 황폐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나라도 가난을 구제(救濟)하지 못해 그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자가 살아 남기위해 먹을 걸 찾아

해매는 것이 어느집 없이 하나의 일과였다고 한다. (극히 적은 소수의 예외의 사람들도 있긴 있었지만)


36년간 일본놈들에게 수탈당할때로 당해 나라가 빈 곳간이었고 해방당시 가진 것이라곤 남북민(南北民)을

포함해 3천만명 사람들의 빈손과 입뿐이었다 한다.

전쟁이 없었다해도 지독하게 가난했던 우리나라가 하물며 전쟁의 소용도리속에 무슨말을 할수있었겠나?


당시 부산의 거리엔 팔다리가 없고 눈이빠저 앞을 볼수 없으며 온몸이 만신창이되어있는 상이군경(傷痍軍警)들이 먹을 것을 동냥하기 위해 이거리 저골목으로 잘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을 이끌고 "배곺아요한푼주소" 나라위해 바친 목숨과 몸들은 눈뜨고는 차마 못볼 불상한 처지의 신세가 됐지만 가난한 나라가 어쩔수

없었다고 하지만 잘사는 지금에 와서도 상이군경에 대한 보상은 다른 사건과 비교해서 아예 형평성이 없다. 


(지금은 데모하다 또 어떤계기에 우연한 사고로 난 사상자(死傷者)들의 후(厚)한 국가보상지급을 보면

6.25 때 나라위해 받친 군경전상자(軍警戰傷者)들이 참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또 전쟁 고아들이 입지도 먹지도 못해 빠짝마른 몰골로 밥한숟갈 어더 먹어려 그야말로 전쟁상태고

운이 좋은 애들은 해외로 입양되어 절망에 빠저 있는 나라와 국민은 희망이 도저히 보이지 않은 바로

망국(亡國)직전의 처절한 상황이었다.

불과 65여년전의 우리나라 우리들의 처참한 모습인데 얼마나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지?...


그때의 전쟁고아들이 지금도 이따끔식 모국(母國)의 부모형제를 찾거나 입양한 그 나라에서 성공한 사례를 가끔 볼때 그 시절 핏덩이가 그래도 살아 남아 모국이라고 찾아 오는 걸보면 눈에 선해 눈물이난다고 한다.


그런 국가적 빈곤과 불행으로 정치하기 가장 힘들때 어떻게하던 개선해 볼려고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휴전 이후 미국이 별볼일 없는 대한민국에서 손을 뺄려는 낌새를 차리고 그 분의 뱃쨩, 슬기로운

안목(眼目)과 지혜(智慧)로 외교적 탁월한 지도력에 의해 미국의 코를 어떻게 꿰찼던 간에 힘없는 소국

(小國)이 해방을 시켜준 강국(强國)들을 상대해 한미방위조약을 이끌어 내고 전후(戰後)에 당장 시급한

국민의식주(國民衣食住)의 기본적인 생필품 원조를 우선 먼저 받아 냈었다.


당시에 구호미(救護米)를 비롯해 밀가루 우유 설탕 옷(衣). 집지을 제목(材木) 의약품 등등, 나라의 경제적

혈액순환이 돌아가게 하고 파괴된 것들을 부흥(復興)하면서  불안한 민생이 한결나아저 모두가 희망을 갖고 제자리에서 열심히들 살게 했고 나라의 안보와 방위를 위해 무상으로 북(北)을 대적할 무기도 공급받아

그때부터 국군현대화도 이루어내고 차츰 안정을 찾아갈때~

우리민족이 일제(日帝)의 속박을 받은 것은 국민대다수가 문맹자(文盲者)이기때문에 배워야 제 나라와 

제 가정을 지킬수있다고 하며 제일 먼저 국민의무교육부터 그분이 그 와중에도 실시하셨다.


아무것도 없었고 대다수의 국민이 무식(無識)한 때, 가진 건 맨손과  입 뿐인 나라를 민주주의가 뭔지도

몰랐던 국민을 깨우처 (대한민국을 민주독립시키고) 국가의 운명이 멸망직전(滅亡直前)의 전쟁에서

국토와 국민을 지켜내신 초대대통령 이승만박사님의 영전에 진심으로 이 시간까지 이 나라에서 오늘날

까지 살아 남게 해주신 걸 상철은 진정을 다해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이라 한다.

지금의 모든 국민이 지난 아프고 어려웠던 역사를 다 잊고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그분을 폄훼하고 있지만,   


상철은 그런 암울했던 시절(時節)에 자라오면서 살아온 삶을 되돌아 볼때 내가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그때 꼭 그랬어야만 했었나? 살다보면 어느 누군들 그 삶에서 돌이킬 수 없는 회한(悔恨)이 있기 만련이다.


사람이 늙어가면서 무료해지고 그러다보면 새록새록 살아나는 것이 옛추억으로 그 속에서 산다했던가?

상철이도 벌서 그 인생의 종착역을 바라보며 (하늘에 뭉게 구름이 서로 섞혀 어디론가 흘러가 듯) 그 속에

지워지지 않은 가슴 아픈 사연이 세월이 더할 수 록 잊어지지 않고 지금에와서 아무리 후회해본들 그때~

그 일 그 생각에 가슴 멍던 사연이 오히려 갈수록 괴로움에 이자(利子)까지 붙어 더욱 아프다고 한다.


상철은 당시 부산영도 대평동에 있는 조그마한 전기공장(電氣工場)에서 자고 먹고 하며 잔 신부름하고

기술일을 배우며 월급은 없었고 입에 풀칠만 하는 것도 너무 감사해 그런 환경에서 열심히 살았다 한다. 


그때 추석직전의 날 밤8시경에 집에가 추석날 하루자고 다음날 공장에 오라고하여 첫 휴가받아 가는

기분은 정말 해방이다란 느낌을 온몸으로 처음경험했다고 한다. (군(軍)에서의 첫 휴가 기분이랄까?)


그 시절에는 간첩활동 암약방지(暗躍防止)와 국가보안(國家保安)을 위해 전국적 야간통행금지가있었다.

지금에와서는 그런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희미하지만 밤10시부터 새벽4시까지에 통금(通禁)을 한 것같다.

저녁 8시부터 쯤해서 밤9시전까지는 어떻게 하던 간에 모두가 귀가전쟁(歸家戰爭)으로 난리가 났었지! 


상철이도 그때(16세)쯤 부산영도 대평동공장에서 (약4킬로) 걸어서 전차종점까지(당시는 지금의 전동차와 비슷한 전차도 다녔음)와서 뻐스를 탈려니 자칫 이시간때에 뻐스를 놓지면 통금에 걸려 경찰서에서 하룻밤 자야하니까 (추석은 도로묵돼고) 모두가 차를 놓치지 않으려 오는 마지막 뻐스 탈려고 필사적이었다.


더구나 내일은 바로 추석이니 꼭 뻐스는 타야겠는데 그 마지막 뻐스가 문을 닫으려고 차장(車掌)이 그때는

(차내여자안내원)이 승차비(乘車費)를 일일이 손님으로부터 돈을 다 받고 뻐스문을 닫고 난후 최종적으로

오라잇 신호를 보내야 운전수가 차를 출발시키는 시스템이였다. (지금의 버스카트는 상상도 못한 시절)


상철이가 꽉찬 뻐스에 맨 마지막 손님돼서 필사적으로 매달리니 차장이 같이 타고 가야하지 않겠냐고~

한걸음식 안으로 들어가라해 겨우 뻐스 발판에 타서 문을닫고 출발해 당시 밑동네에 있는 로타리근처

남항파출소 쯤 갔을까?

뭔가 쿵하고 내 발딛고있는 발등 발판에 떨어지는 것같아 만원뻐스에 움직이기도 어려워그냥둘까하다가

그래도 어린맘의 호기심이 발동해 겨우 허리를 굽혀 주어보니 꽉찬 만원뻐스의 어둠속에서도 느낌상 돈뭉치인 것 같았다.

누가 가진 돈을 복잡한 차내서 밀고밀리다 떠러터렸거나 아니면 쑤리꾼(소매치기)이 남의 주머니에서

슬적 훔치긴 했지만 사람들끼리 꽉 찬뻐스가 흔들리고 워낙 부딧치다보니 떨어트린게 아닐까?...


내가 남의 돈을 훔친 것도 아닌데 괞히 가슴이 쿵덕쿵 뛰는 느낌을 받는 순간 이 돈주인이 누구요하고-

목소리가 나오다가 안나오고 어정쩡하게 본능적으로 혹시나 누가 볼세라 얼른 가슴팍에 찔러 숨기고 주위를

두리번거려 봤으나 뻐스만 흔들릴뿐 아무도 잊어버린 사람의 무슨 낌새가 나지 않는다.

다소 안심되어 에라 모르겠다 이게 웬떡인지 내 복(福)이고 홍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스처고 내일 추석인데...

집에 돌아오니 상철의 엄마가 반갑게 손잡고 맞아주시고 얘야 공장에서 참 고생마이 한데이 하고

눈물을 글성거리며 어린 것이 부모잘 못 만난 죄로 그 고생을 어이다 말 할꼬?... 다 내죄다 하시며,

치마앞자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시는데 찡한 마음에 그냥 뭐라카노 엄마 나 괞찬다 하는 목소리가!... 

찟어지게 가난한 집이였고 당시 국가사회도 말이 아니게 가난과 혼란, 전쟁후유증으로 모두가 힘들때였다.  


추석이래야 모처름 고작 흰쌀에 보리좀 썩어서 밥 한거릇 먹는게 다지만 그래도 아버지 없는 집에서

엄마 중심으로 남매가 모처름 얼굴마주하며 모여서 즐겁고 감사하게 한끼의 따뜻한 밥을 나눌수있다는것,

가족이 다 모여 정말로 여유로운 시간 즐겁고 행복했었다.

 

집에서 식구들이 아무도 못보는 곳에서 슬며시 주운 돈을 살펴보니 가느다란 실 같은 끈으로 꽁꽁묶은

꾸깃꾸깃 꾸겨진 돈으로봐서 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 것이거나 아니면 막일을 하는 사람들이

추석이라고 받은 품삭 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65여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잊어버린 그 분이 궁금하고 그때 그 분은 이 잊어버린 돈때문에 추석도 잘 쇄지도

못하고 얼마나 절망적인 기분에 가족분위기가 허탈하고 기가 찾을까?...

또 갖어간 놈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경제적으로 얼마나 난처하고 애가 탔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아파 그 일을

내가 죽는 순간까지도 그 분의 당시 곤란한 처지가 눈에 보이는 듯해 잊지 못할 것같아!...

그때 그 순간은 좋기만 했지 마음과 양심에서의 울림을 전연 깨닫지 못했다. 철들어가면서 괴로웠지! 

지금와 생각해보면 만일 그때 숨도 쉴수 없는 만원 뻐스 발판에 매달려 내가 이 돈 잊어버리신 분은요~

하고 소리첬드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경찰서 가서 조사받느라고 승객들이 밤을 새우고 모두가 추석은 날 샛을 것이다.


그때의 기억으로 화폐단위가 원(圓)에서 환(阛)으로 바꾸어 진 것같고 즉 천원이 백원이 되지않았나 싶다.

당시 중국짜장면 한그럭 값이 백환에서 이백환정도 할 때 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주운돈이 무려 천환(千還)이 조금 못된 것같았다. 짜장면 60~70 그럭 값이 될 것같은데 모두가 현금이 귀하고 없던 시절에 참 큰돈이었다.

물론 나로서는 출생이후에 그렇게 큰 돈은 처음만저 봐 그저 흥분했었지만!!!


하룻밤 추석을 쇄고 공장으로 갈때 상철은 엄마에게 그 돈을 슬며시 내미니 엄마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야야! 니 공장에서 월급도 안주는데 이 큰 돈이 어디서났노?...

눈을 똥그랗게 뜨시며 근심서럽게 처다보는 엄마의 눈빛에 가슴이 찔렸지만, 입 꾹다물고 공장 일이 잘되서 내가 2년 동안이나 꾹 참고 잘견디고 일잘해줘서 공장장님이 추석쇄는데 집에 뭘좀사가라고 주는 돈아이가!

엄마손에 쥐어주고 달아 나듯 공장으로 가면서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못한 것이 마음 찜찜하고 죄서러웠지만,늘 쪼달리시며 사시는 가난한 삶림살이에 큰 도움될 것만 같아 한편으로 마음 뿌듯하기도 했다.


당시 돈을 주었을때 공짜로 얻는 기분이 참 좋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철이 조금식 들어가 그때 잊어버린

사람의 입장이 돼봐서 추석 쇌려고 그 돈을 가지고 집에 기쁜맘으로 바삐 가다가 집에서 그 돈이 없는걸

막상 알았을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 당장추석은 내일이고 가족은 자기만 처다보고 있었을텐데...

그 분과 그 가족들에게는 정말 맑은 하늘에 날 벼락도 유분수지 그 허탈감과 실망서러움을 넘어서~

"잊어버린 자기의 잘못은 고하간에" 얼마나 많은 원망과 욕을 했겠나???!!!


뿌리처도 생각은 더 살아나 늘 그 생각이 가슴을 압밖해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덩어리에 땀이 솟고

그분께 용서구하며 속죄하고 싶지만 그럴 방법이 막막해 더 괴롭다 한다.

80여년 인생에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의 빚과 괴로운 족쇄는 풀길이 없어...


사람은 일생에 죄를 짓고 않짓고 간에 자기 스스로의 양심에 부끄럼 없이 살아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그 순간 그 공짜 횡재(橫財)는 좋았지만 그로인한 무거운 업보(業報)로 평생을 가슴에 혼자만 아는 주홍글씨압밖을 받고 살면서 남은 여생이나마 후회가 될 짓은 안하고 살기를 자식들에게 고백하고 당부하겠다는 

상철이의 쓸쓸한 멋 적은 웃음은 참회의 고통이기도 하겠지만 왠지 나의 일이기도 하다 싶다.   


2017.5.28

-남경-

(누구나 다 비밀하나 쯤은 있어 털어 놓고 말 못 해온 이 맘의 고통을 누가 어이 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