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삶의 이야기라고 할까?

3) 저가 존경하는 분 (이순신장군) 님은...

단해 2014. 10. 16. 00:07

요 얼마전만해도 이순신장군을 배경으로 한 "명량"이

인기몰이로 화제가 되어 영화가를 주름잡았지!

"명량"은 천오백만명 이상의 국민이 관람하고 초스피트로 대박이 난 영화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국가사회가 (뭔 간가 모를) 전쟁전야 인 것처름 모든 위계질서가 해이하고 엉망이다.

지금 우리 주변국가의 정세는 당시 이순신장군을 전쟁터에 불러 낼만큼 국제적인 힘의 관계가

그때처름 서로 얽혀 미묘하고 복잡다난해가고 있는 이때, 우리의 내부사정은 국민계층간 많은

갈등과 상호불신으로 나라가 위험수위까지 스스로 차올라 가고 있는 것같다.

   

당시 임금이나 대신들이 장군을 알아주건 몰라주건 간에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권력자들로부터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갖은 모략과 모욕, 핍박을 받아가면서 그래도 초지일관해 변함 없었던

충절(忠節)사심 없이 국가와 백성을 위해 희생하시며 자기 한목숨을 불태우고 다 받처 나라와

임금과 백성을 구한 인간 이순신장군님이 아니셨던가! 

그때와 같이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장군과 같은 강력한 리드슆을 가지신 분이 혜성처름 나타

나시어 이 어려운 난국을 정리하고 화합하게끔 수습해주시기를 갈망하는 마음에서 "명량"

국민적 관심을 모으며 인기가 폭팔 하지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왜국의 침입으로 이미 나라의 체제가 무너저 패망직전의 바람앞 등불같았던 급박함에서 왜선 400여척의

적함을 앞에 두고  적의 힘과 비교도 할수 없는 열세에서 출전하시며 임금께 올린 장계는 그의 충직함이

비장하여 지금도 우리가슴을 메어지게 하고있다.

<신(臣)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고>.................................................

출전에 앞서 참모 장수들을 모아 놓고 그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죽을 결의와 각오를 피력하셨다.

필생즉사 사필즉생(必生卽生 死必卽生) 싸움에 있어 죽고자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하면 죽는다라고,

의연한 결의를 다지시며 마지막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내시고 또 죽어가면서까지 마무리로 남긴 말씀은,

전방급 신물언아사(前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시면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시고 태산과 같았던 장군깨서는 장열히 순국하셨다.

 

이순신장군은 치밀한 성격으로서 그 전쟁의 와중에서도 난중일기의 기록을 지휘관이 직접 쓰고 남긴

전쟁기록은, 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우리가 자랑할만 한, 독보적인 해전(海戰)사료일 것이다.

또한 인간 됨됨이 극진한 효자로서 "어머니" 를 하늘 같은 존재로 모시며 그 전쟁와중에서도 휴전이 되면

밤 10시쯤에 배타고 가, 어머님께 꼭 문안을 드리는 그 어머니의 순박한 한 그 아들이기도 했다.

 

임진홰란 7년간 왜군과의 전투는 우리가 알고 있는 23전 23승이 아니고 실재는 45전 40승으로서

지금까지의 인류해전사상 이 기록을 깬 해전은 아직까지 없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잘알고 있음으로 긴말이 필요치 않아 여기서는 요약해 쓰보기로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있는 바와 같이 충무공 이순신장군께서는 조선조때의 명장이시다.

1545 (인종 1년) ~ 1598 (선조31년) 본관은 덕수(德水) 자 는 여해(汝諧)이 시다.

장군께서는 당시 늦은 나이 32세 때, 겨우 과거에 급제하시고 왜국의 침입으로 나라가

존망이 아주 위태로워 진 후, 49세 때 제독이 되신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이셨다.

 

다들, 너무나 잘알다 싶이 임진왜란 때 조선이 일본으로

편입되어 조선이란 나라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우리모두가 "나까무라상" "호시모도상" 하고 지금의 일본인으로

행세하며 살아갈뻔한 일을, 죽음으로서 우리의 성(性)을 지켜

주시고 막아준 세계에 자랑할 우리민족의 위대한 영웅이셨다.

오늘날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국체(國體)와 성(性)과 이름(名)을 지켜갈수있도록 해주신분이시니 어찌 영원토록 기억하며 장군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시며 일본이 침공하여 임진왜란 시절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시고 임금과 대신들로부터 갖은 모함과 박해를 받아가며

온갖 역경속에서도 변함없고 일관 된 그의 우국지정(憂國之情)과 품위있고 고결한 인격은 온 겨례가

추앙해야 할, 의범(義範)이 되셔서 우리민족의 영원한 사표(師表)이시다.

만약 그때에 장군께서 이 돼먹지않은 세상하고 불만을 토로하셨다면 쿠테타하기가 식은 죽 먹기보다쉬운 일이었지만 깨끗한 정심(正心)으로 그분은 끝까지 임금과 백성에 대해 충의(忠義)을 지켜셨다.

 

명랑대첩. 노량해전. 옥포해전. 당포해전. 울포해전. 한산대첩. 부산포해전. 안골포해전. 칠전해전 등등,

싸우는 곳 마다 전승(全勝)으로 왜놈을 무찔러 왜놈들은 이순신 이름만들어도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장군의 치밀한 작전계획은 전투때마다  유례 없는 승리를 하셨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 앞 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이 이끄시는 조선수군이 일본수군과 벌인 마지막

회전에서 400여척의 전선(戰船)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방면으로 도망첬는데 이순신장군은 끝까지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였다.

이 추격전에서 이순신장군은 적의 유탄에 맞아 장열하게

전사하시며 죽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안위(安危)와

전세(戰勢)를 걱정하시고 눈을 감지 못하시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고 당부하셨다.

계속 적을 추격하여 격파하라고 유언을 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왜군을 소탕한 후 장군의 전사소식을

들었으며, 왜군은 겨우 50 여척만 남은 배를 수습하여 (좃) 이 빠저라 하고 일본으로 도망첬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7년간이나 지루하게 끌어와 백성과 나라가 토탄에 빠저 우리가 통체로 망한 꼴이

되었던 기나긴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장군의 애국헌신(愛國獻身)으로

결국, 장군께서 죽음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승리하고 일본의 패전으로 끝이 났다.

 

(나는 그 당시를 다시 한번 회상해 본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장열한 최후로 죽지 않으시고 살아남아 7년간의 몸서리칠 전쟁의 승리자로서 나팔불고 북치며 개선장군이 되었다면, 그 분의 "운명" 은 그 후, 우리조정에서 또 어이되어 갔을까?

공신(功臣)으로 추앙받아 그 전쟁의 보상(補償)을 받고 

만년(晩年)에 영화를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건 아닌 것같고 절대로 "NO" 다 라고 단정할 수 있겠다.    

아마도 기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조정내에서 그 분의 힘이

커저갈 전공(戰功)을 우려하고 시샘하는 각, 붕당(朋黨)의

당파(黨派)끼리의 음모와 모함을 받아 또 옥살이를 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중죄인으로 전락시켜서 사약(死藥)을 받게 하여

결국은 적군이 아닌 아군의 정적(政敵)들 손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까 다)

당시의 임금이나 대신들이 하는 "정치" 꼬락서니를 봐서는.......

어찌보면 장군께서는 적군의 손에서 잘돌아가셨다. 싶기도 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성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입지에 위협을

느껴면 큰 훌륭한 인물을 받아 드리지 못하고 소인 배들이 자기들의 눈과 식견으로서 입맛대로 자신들께 유리한 "여론이란 걸" 만들어 정치를 좌지우지 하고 잘해보자는 옳은 사람의 발목잡아 너러지고 있는 것은!.. 그때 그 시절의 정치꾼이나 오늘날 우리

정치, (정치꾼)의 현실과 별반 달라진 게 없지 않은 가???

 

세월이 흘러도 붕당(朋黨)정치꾼의 흐르는 피엔 정의가 유산(遺産)되지않고 아집(我執)과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권모술수(權謀術數)의 더러운 인자로만 유전되지 않았나 생각케 한다.

(국민을 똑 바로 보지 않은 정치!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가슴에 묻어 둔다 하였는데- 살아있는, 사람들의 욕심은 어이 이다지도)

이들에게 이순신장군님과 같은 옳 곧은 성심(誠心)의 마음이

머리털껏 만큼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던들, 이런 민 낯 들일까?

 

장군의 난중일기 (亂中日記) 는 임진왜란 7년간의 전쟁중에서 쓴, 진중(陣中)기록으로,

전쟁 영웅이시기 전에 한 인간이 기록해 온 고뇌에 찬 처절한 자기 고백서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16세기 동 아시아 역사와 해전사(海戰史)를 살필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그 가치는

혜아리기 어려워 장군이 남기신 우리역사이고 보물이며 유산이다.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그 전쟁통에서도 이런 기록을 컴퓨터도 없었던 시절 일일이 하자한자 손으로

종이에 빠짐없이 많이 쓸수 있는 끈기와 성실하심에 대해 우리는 그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며-

그분은 다시 현신(現身)하기 어려운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인격자이시고 도덕군자요 충신이셨고

드물게 볼 수 있는 효자이시다.

그분의 고매하신 품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귀감이 될 시(詩)와 좋은 말씀을 많이 남겨셨는데,

그중에서 한두가지만 여기에 옮겨 보기로 한다. 

 

임금님의 행열은 서쪽문으로 멀리떠나고                                  

북으로 간 왕자들도 위태롭구나

외로운 나는 날마다 나라 걱정,

장사들이여, 공을 세울 기회이니라

바다를 두고 맹세할적에 어룡이 뛰어 오르드니

산을 두고 맹세하니 초목이 떠는 구나

이 원수의 오랑캐들을 다 섬멸할 수만 있다면

내 비록 죽음이라도 불사 하리.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올라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 성 호가는, 나의 시름 더해주네 

 

윗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지마라.

 

(나는 끊임없이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功)을 빼았긴체

옥살이를 해야 했다)

 

"옳치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불평하지마라.

 

  

간윤, 2010년 ‘대학 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    이충무공의 <b>거북선</b>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또 등재!! ( 난중일기 ) 

 -남경-

2014.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