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삶의 이야기라고 할까?

5) 저가 존경하는 분 박정희대통령님!

단해 2016. 3. 24. 00:06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그 분은 누구이신가!

 

하늘이 내려주신 고귀한 생명 그분을 잉태한 비록 그분의 엄마였지만,

뱃속의 태아(胎兒)를 죽이려고 갖은 애를 다 쓸수 밖에 없었다.

태어날때부터 전생(前生)이 있어 그런고초는 그분의 숙명(宿命)이었던가?

 

그 어른께서는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 5.6.7.8.9대 대통령으로서

약 18여년간 장기집권을 하며 우리나라를 통치하신 분임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분의

치세(治世)에 대한 공과(功過)는 현 싯점에서 평가가 다양하게 엇갈려 찬반(贊反)에 말도 많다. 

좀 더 세월이 지난 후 더 똑 바로 옳바른 진실을 역사의 양심(良心)이 진단(診斷)해 반추해줄 것이리라!

 

그분은 1917년 11월 14일(음력9월30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 171번지에서 아버님 박성빈

어머님 백남의 사이에 5남 2여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셨고 본관은 고령(高靈)이시다.

 

박정희의 아버님께서는 당시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때는 일본, 청국, 러시아가 그 시절 조선에 들어와

서로 힘자랑을 하며 격돌하던 때 였다.

나이 22세에 소위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해 동학란(1892년) 때 지역대장으로 가담했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 난 후 매일 술로서 비분강개하며 날을 지새웠다고 한다.

그 아버님께서는 술을 좋아하시고 호방하시어 친구를 좋아했고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그 엄마가

생활을 근근히 꾸리게 된 그때 그런 집안형편이였다.

어머님 가계(家係)는 고려때부터 주자학자, 성리학자, 등으로 이어지는 명문가에 태어나 비교적

호강서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유복한 집안에서 곱게 자라난 뼈대있는 규수다. 

 

박정희대통령께서는 그시대 드물게도 당시 아버님 46세 어머님 45세의 막내 늦둥이로 태어났지만,

<"까딱했으면 그분께서는 이 세상구경을 하지 못할 뻔 했지!">

그 조상님과 천지신명의 보살피는 도움으로 또 어찌보면 그 분의 탄생은 우리나라의 國運으로서

이 세상을 구경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기도 하다. 

 

그 시대는 환갑까지만 살드라도 많이 살았다고 하던, 참 어려운 그런 시절이었고 매년 보릿고개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먹지 못해 배곺아 굶어 죽어가던 비참하고도 슬픈 시절이었다.

壽命이 짧아 40세만 넘어가면, 긴 장죽 (대나무로 만든 긴 담뱃대)을 물고 저절로 노인행세가 자연서러웠지!

 

박성빈(박정희아버님)家에선 이미 딸이 시집을 가서 아이를 갖고 또 며눌이가 들어오고 하던 때에-

나이 45세나 된 다 늙은 할머니가 (박정희의 어머님) 이미 시집간 딸과 함께 늦동이를 출산을 한다는

것은, 식구들에게 어른으로서 체통이 서지 않을 뿐만아니라 동네 사람들 보기도 남새서럽고 어려운 살림

살이에 아이 입 하나를 더 보탠다는 것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백씨(박정희엄마)는 현재 자신에게게 주어진 여러 사정을 감안해 아주 모진 맘을 먹고-

막내 아이(박정희)를 지우기 위해 그 시절은 낙태방법이 전연 없던때라, 구두(口頭)로 전해오는

민간요법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뱃속의 아이 사산(死産)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고 한다. 

 

그분 어머님께서는 박정희를 낙태시키기 위해 그 짠 간장을 한사발씩 들이키다가 몇일씩 알아 눕기도 했고 밀 기울을 끓여서 마시다가 까무라치기도하며 높은 돌 위에서 뛰어 내리기도 해보고 장작더미나 언덕에서

구르기도 했고 수양버들강아지 뿌리를 끓여먹다가 정신을 잃기도 해가며 디딜방아에 배를 내어 놓고 가볍게 찍기도 해 박정희죽이기를 갖은 노력을 다해왔지만 산모의 고통만 더해갈 뿐 그때마다 뱃속의 아이가

몇 일씩 죽은 듯. 놀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또 다시 끈질긴 생명이 놀기를 반복해 그때의 박정희는 원치않은 기구한 출생(出生)으로 집안형편에 특히 그 엄마에게 많은 심적 부담을 주는 不孝 본의 아니게 했다???

 

해볼 방법은 다해보았고 이젠 지쳐서 지우기를 포기한 후, 애를 낳으면 이불에 싸서 아궁이에 집어 넣어려고 했지만 (그런 마음 가짐을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갑짜기 진통이 와 막상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아이를 혼자 낳자마자 그만 정신을 잃은 통에 그 계획마저 실패했다고 한다.

생명을 보태한 그 엄마인들 운명적으로 타고 나는 그분의 강(强)한 숙명을어찌하지 못했으니!!!

 

당시는 우유같은 것도 없고 먹는 게 귀하던 시절이라 어머님의 젖꼭지가 말라 붙어 밥물에 곷감을 넣어

끓인 물이 박정희가 세상에서의 첫 음식이었고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때부터 그는 복중(腹中)에서 갖은

고초와 시련을 다격었지만 그 누구도 그분의 건강한 운명적 탄생을 세상은 막지 못했다.

 

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서 교사를 3년간 하였고 그 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

과정에 편입해 졸업하고 만주보병제 8사단에서 일본이 제 2차세계대전에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장교로

근무하다가 1945년 8월 해방이후 광복군 제 3지대 제 1대대 제 2중대장을 지내다가 1946년 7월에

귀국하셨다.

그 후 대한민국의 장교로 지나며 남조선 로동당 여수순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사형언도까지

받았으나 당시 (백선엽) 등이 구명에 나섰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대한민국의 장교로 참전하였다.

 

민주당 張勉政府 1960~1961년 (더불어민주당의 전신) 4.19로 인해 당시 執權 自由黨이 몰락하고

이어서 집권하였지만 民主黨治世能力無能으로 인해 날이면 날마다 데모로 날이 새고 데모로 밤이지던

무법천가  되어 나라가 혼돈에 빠저서 國基가 흔들리고 안보와 경제가 도탄에 휘말려 혼란이 걷잡을 수없는 지경에 이르러 북(北)이 또 남침할 기미를 보이고 나라의 存亡이 심히 우려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한치 앞도 알 수 없을 때, 박정희와 애국군인들은 이 대로 나라가 망하고 국민이

도탄에 빠저 공산화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하여  그 나름데로 애국충정의 결단으로 혁명공약

내걸고 잘되면 충신이고 못되면 역적이돼 생명을 받칠각오로 1961. 5. 16. 쿠테타(군사정변)을 이르켜 

기하셨다. 그 후 反政이 성공해 軍政으로 집권하면서 3선개헌 및 유신헌법 등, 약 18여년간 장기집권을 

하면서 역사적으로 우리근세사(近世史)에 많은 영향을 끼치신 분임을 우리국민과 세계는 다들 알고 있다.

 

군정(軍政)과 유신 등을 반대하던 야당(재야) 및 학생운동, 노동운동, 기타 민주화 세력들과 끊임없이 

충돌도 해오며 5. 16 군사정변과 유신을 통한 헌정파괴, 군사독재로 한일 협정을 강행한 것과 월남전파병

등등, 과감한 軍政政策決行은 그러한 변화(變化)를 반대하는 많은 국민의 저항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뤘고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어촌 발전에 성공했으며 

경제적 측면에서 전쟁과 피폐해진 대한민국의 중병(重病)을 살려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단군이래 5천여년간 지속되어 온, 나라와 국민의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게 한 것은

그분에 빛나는 업적임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도 우리가 그분이 놓으신 초석(礎石)과 기틀위에서 이루어 낸 과실(果實)을 따먹고 있지 않은가?

 

또한 저개발 개도국(開途國) 여러나라는 새마을운동이 그나라의 국가발전에 지금까지도 롤 모델이돼,

전 세계가 단시간내에 압축성장발전한 대한민국을 칭송하고 또한 그 노하우를 배우려하고 있음은 

박정희의 군사구테타가 성공한 철학(哲學)을 가진 혁명으로서 승화했음을 인정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미 알 사람은 다알고 있는 박정희대통령의 업적에 대해 일일이 여기선 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후진국 백성이 돼 가난을 숙명으로 알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때 5.16과 같은 그런 천지개벽할 변화가 나라안에 없었고 구 정치인들이 지금까지도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形態속집권해 정치를 해왔다면 作今대한민국은  어떤 꼴을 하고있을까?)

 

눈에 띠이는 한가지만 보드라도 대한민국의 지난 날 산이 민초들의 땔감으로 그의가 현재 이북의

민둥산처름 대머리 산이었지만, 보이는 곳마다 울창하게 우거진 푸르른 살림이 산하(山河)를 덮고, 

눈부신 전자산업, 철강산업, 조선업, 중화학공업 등등, 선진국의 것으로만 여겼고 우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왔지만 세계가 깜짝놀라고 찬탄할만큼 5. 16을 구심점으로하여 이후 우리의

산업은 내수공업과 함께 수출과 더불어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팽창하고 거침없이 발전해 왔다. 

 

역사이래 한가하던 우리 땅에 수많은 자동차 와 고속도로 및 산하의 강 많은 뱃길과 하늘 길을 사방팔방,

나아갈 길을 뚫고 국내외를 개척해 처음부터 에서 를 창조한 이 거대한 물결을 열어가신분이누구신가?

(그간의 역사는 우리가 먹지못해 병들고 죽어갔지만 이젠 너무잘먹어 몸에 탈이 날 지경에 까지왔다)

 

지금도 민주민주하고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외처본들 국가와 국민의 자본이 안정적으로 구축되지 않고 (절대적 빈곤상황에서) 누리고있는 자유민주주의인들 과연 실질적으로 어찌가능했겠는가?

 

박정희의 꿈은 당시 시대상황으로서 부득히 군사쿠테타로 출발할수밖에 없었지만 대한민국을 위한

그의 眞心과 열정은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군사정변이 혁명으로 勝利昇華한 결과이다. 

그가 꿈꾼 혁명적 철학기조를 반포한 <혁명공약> 에서 다시한번 엿볼 수 있지 않은가?

 

1) 반공(反共)을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의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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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존의 구정치인들이 受權태세가 되어있지 않음으로서 구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지 못하고  

본인이 직접 전역하여 民選에 출마해 民主競選회복하고 자유민주선거에서-

당시 민주당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이겨 국민이 뽑았고 민선(民選)대통령에 당선되었음으로

국민은 이전의 군사(쿠테타)의 혁명정부를 결과적으로 추인한 것임을 간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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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경의에 찬 눈으로 대한민국을 지켜보고 있는지금 나라의 발전에 起爆製가 된 군사혁명에 대해

민족의 긍지와 자존심으로 우리가 스스로 박정희를 폄훼(貶毁)할 것이 아니라 萬邦에 선양해야 마땅하다.

 

그분께서는 국정을 주도해가실때 온갖 인신공격과 인간적인 중상모략모욕 등, 독재자라고 입에 침을

튀기며 많은 험담을 야당이나 반대세력들에게 먹고 발목잡혀가면서까지 한일국교정상화를 하자면 매국노

라하고 월남전파병을하면 젊은 피를 팔아 먹는다하며 경제를 살릴려고 남의 나라 돈을 좀 빌리려면 차관망국이라 해되고 나라의 동맥인 고속도로를 뚫으면 국토해체라고까지 반발하며 혁신적인 개혁개발정책을 발복잡고 반대를 위한 반대밖에 할줄모르는 기존 구정치인들을 바라보며 너무나 어이없고 답답한~

그분의 심정은 차라리 야당으로부터 독재자라고 불릴지언정 나라와 국민을 위한 나만의 大統領의 所信에 길로 가야만 하겠다는 각오와 일념은 오로지 조국근대화의 神話에 매달린 것이 아닐까?

 

자신의 국정철학을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림없이 강한 신념과 의지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 

블도저처름 밀고 나간행위는 역사적으로도 옳바른 판단이었고 선택이었다하며 당당하시.

특히 야당 등, 그분이 잘한 일에 대해서 단 한번만이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며 격려의

박수를 처준적이 있었던가???  그분은 살아서나 죽었으나 지금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동작동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내 무덤에 춤을 뱉어라하신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나갈길을 중단하는 자는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하시며 지금까지도 되풀이 되고 있는  

우리정치가 하나도 변치않은 딱한 현실을 보시고 깨어나라! 정신차리라! 안타까히 외치고 있는 듯하다.

 

(이 핵개발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이때  우리의 안보와 자위권 보장을 위해 그분이 지하에서

한탄하고 있는 것은 리도 핵개발을 자신의 치세에서 완성해 놓치 못했음을 통탄하고 계실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이 지금도 박정희전대통령님을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감히 묻고 싶다!

아마도 친일파란 딱지는 일본식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육군사관하교를 나와 일본군에 복무한 근거로

비난하는 것같은데 倭政治下에서 박정희의 일본식 개명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당시(23세)이다.

그때 우리나라국민의 97%는 일본의 압제에서 살아 남기 위해 모두가 창씨개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39. 11. 10 일 당시 조선총독부 창씨개명공포에 의해 시행된 창씨개명은 朝鮮人 民族精氣를 말살하고

日韓合邦에 의한 內鮮一體하고저 한, 일본꼼수정책으로 朝鮮의 氏(씨)를 뿌리체 말살하기 위함이다.  

 

그 어려운시대에 조센징은 일본사관학교에 감히 갈수도 없는 입장에 박정희는 그때 우수한 성적이어서

다행히 입교할 수 있었고 그 곳에서 교육받는 동안 세계의 新文明과 시대의 흐름 및 새로운 文物 등등,

우리국민은 고등교육을 배울수없는 시절에 많은 지식을 터특했음으로서 후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그때 습득한지식을 밑바탕으로하여 해방된 조국에 그 지식을 국가와 국민에 환원함으로 그분께서 우리가 

본바와 같은 위대한 일을 해갈 재목과 능력이 그런 경우를 격음으로서 배양되었다고 볼수있지않은가? 

그때 倭政治下에서 대학. 군사학교. 및 일반학교이던 간에 무엇이던 훗날을 위해 배울수 있는데까지는

어디가서 어떤걸 배우던 배울수만 있다면 일본학교. 중국학교. 미국학교가 그게 다 무슨 죄가되나?

 

그시절 이완용같은 적극적인 매국노적 친일파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처단해야할 민족반역자이지만!

살아 남기위해 군대를 가던 징용, 부역을 하던 정신대에 끌여갔던 또 부득불한 입장에서 잔심부름

수 밖에 없었던 걸 통칭해서 친일이라고 몰아 붙여 돌을 던질 자격을 가진 그때 100% 깨끗한

집안과 그럴수있는 당당한 사람이 그 시절 어디에 몇 사람이나 있을 수 있었나? 

좋던 싫던 살아 남기위해 창씨개명을 할수밖에 없었던 97%의 백성들을 친일파라 할수있겠나!

일제의 압제에서 생존생명부지를 위해 본인의 뜻과는 달리 위협속에서 직간접으로 일상적

협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다 친일이라고 몰아 붙칠수있는 일은 절대로 아닌것 같다.

지금 친일했다고 자랑서럽게 나서서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때그시절 그들은 어디서 다 뭘했나?

 

왜정치하에 있었던 사람치고 (독립운동을 하였던 가계를 제외하고는) 다들 족보를 까보면 그렇게

떳떳한 집안과 나는 깨끗하다고 큰소리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지금 우리의 군제(軍制)도 마찬가지지만 소집영장을 받고서 타국으로 도망치지 않은 이상 군대안갈 수는

없었 일제치하던 지금 우리의 현실이던 간에 영장이 나온다면 누구나 다 군대가야하지 않은가?

당시 박정희도 사관학교에 못갔다면 영장을 받아 군 또는 징용이라도 끌려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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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대 대통령家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이 기회에 한번 살펴보자!) 

1. 건국초대대통령 이승만박사 (1대~3대까지) 창씨개명하지 않음.

2. 윤보선 전대통령 (4대) 창씨개명하지 않음.

2-1. 장면 전총리- 창씨개명 다마오카 쓰토무/玉岡勉

3. 박정희 전대통령 (5~9대) 창씨개명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4. 규하 전대통령 (10대) 창씨개명 우메하라 케이이치(梅原圭一) 

5. 전두한 전대통령 (11대~12대) 창씨개명하지 않음.

7. 노태우 전대통령 (13대) 창씨개명하지 않음.

8. 김영삼 전대통령 (14대) 창씨개명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

9. 김대중 전대통령 (15대) 창씨개명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

10. 노무현 전대통령 (16) 창씨개명 오카모토(岡本)

11. 이명박 전대통령 (17대) 창씨개명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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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많은 어록을 남기셨지만 저가 강한 인상을 받고 있는 말씀중에)

1) 國力培養. 統一成就. 有備無患 祖國近代化 등등, 

2) 언론에 대해 바르게 알도록하고 바르게 판단하도록 하고 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는 무거운 책임이

바로 우리 언론에 있다.

3) 우리는 자유민주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제도라하드라도

이를 지킬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는 민주체제처름 취약한 제도도 또한 없을 것이다.

4) 제자가 스승을 우습게 여기는 교권(敎權)없는 학원에서 진정한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다.

------------------------------------------------------------------------------------------------추기 : 나, (박정희) 혼자 결정한 비밀사항인데 2년 뒤 1981년 10월에 그만둘 생각이야!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우리의 핵무기를 내외로 공개한 뒤 그자리에서 하야 성명을 낼거야!

그러면 "김일성" 도 남침하지 못할 것이다.

(1979년 1월 1일 청와대공보비서관을 지낸 선우연의원에게 한 말, 하순봉 전 청와대 출입기자의 말)

하순봉자서전에서 밝혀저 있는 글,

 

박정희전대통령님께서는 오천년간 잠자던 우리민족의 魂을 깨워주셨고 우리를 잘살게 해주시며

대한민국의 꿈을 이루어 갈수있도록 국민의 자존심과 긍지를 살려주시고 미래를 열어주신 분이시니

내 어찌 존경해 맞이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분의 理想과 欲望은 南北統一을 이루어내고 政治的 民主主義와 經濟的 成長發展을 함께 이루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세계 역사상 정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일궈낸 그런 나라와 지도자는 없다) 

 

故박정희 대통령이 육여사에게 보내는 편지

(박정희대통령님과 육영수영부인님의 한때 단란했던모습)

                                                                     2016.03.24.

-남경- 

저의 생각과 아는 범위에서만 쓴 글이오니 혹여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옵기를 바라오며

또한 이 글을 보시는 분과 혹시 저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아오니 넓으신 이해로 보아주기 바랍니다.

         (그분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연회를 하던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권총에 저격되어서거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