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삶의 이야기라고 할까?

4) 저가 존경하는 분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님은...

단해 2015. 8. 15. 01:35

우리가 해방 당시 그때 그분이 안계셨드라면 우리나라와

우리국민들은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70년이 지난 광복일 아침에 한번 그 시대를 회상하며

지금까지의 (사실)에 의한 지난날을 드덤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긴글 관심을 가저주시며 찬찬히 읽으시고 다 같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세계 2차대전과 해방전후에 그분께서 갖은 고난을 격으시며 "자유대한민국" 을 건국하지 않았드라면~

지금의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경제속에 풍요를 마음대로 누리며 언론의 자유아래 큰 소리 마음껏 치며 데모도 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이런 좋은 세상은 되어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 건국을 만일 못했드라면 진보와 공산성향의 사람들, 이상향인 북의 공산주의 깃발아래 귓대기

샛파란 김정은을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으로 모시고 가난과 핍박속에서 노예처름 자유와 사유재산권 및 언론도 없이 지금, 찍 소리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숨죽이고 눈치만 살피며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요?

만일 그때 그렇게 되었드라면.....................................................................................

아마도,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고 당연히 전직 대통령들이나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등등의 대통령들도 처음부터 이 나라에서 대통령으로서

존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전직 대령령분 중에서 가장 부정부패가 없었던 인물로서 이승만박사를 비롯해

윤보선 최규하 박정희 등, 생각이나고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등등의 대통령은,

각자가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대통령되기전의 재산과 대통령되고 난후의 재산이 그들은 부정부패로 인해 

하늘과 땅차이가 있고 재직중 그렇게 정치잘하고 청렴한 척해도 다들 먹을 만큼 먹어 국민의 눈을 가려 놓고

지금은 명예실추와 굴욕적인 삶으로 살지만 가진 富가 많아서 어쨋턴 살아 있는 동안 호사하며 살지않은가? 

 

그런데 김대중 노무현 전직 두분에 대해서 많은 국민들이 지지와 칭송을 아낌없이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정말로 묻고 싶어진다. "그분들을 왜그래 존경하느냐고?" 

그 두분께서 우리나라와 국민에게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국리민복을 위해서 어떤 훌륭한 업적을 후대를 위해 역사에 길이 빛나고 남을 유산을 우리에게 "뭘" 물려준신 게 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했다고 내세우는 것과 이북에 실패한 햇빛정책으로 퍼주기식

남북교류를 하고 저 한 것외에는 아주 많은 부정부패로 얼룩진 가족사(家族事) 만히 떠오른다)

그리고 그분들이 깨끗한 모습으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동작동이나 가족개인묘소에 가셨는가?

일일이 글로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그 말로가 깨끗하지 못해 다들 칙칙하고 씁스레 하여 안타깝다.

김대중 노무현 두분의 전직 대통령께서 대한민국에 유산으로 남긴 정치적 업적이란 게 이승만,

박정희에 비해 게임도 되지 않고 비할 바가 못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일이다.

현명한 국민은 계산기 갖고 대한민국의 대차대조표를  대비해 공과를 판단해 보면 정답은 그 안에 있겠지!  

 

일본의 대동아 전쟁이 막 끝나고 우리의 해방당시 그 깜깜하고 어려운 시대 국민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지

못하고 갖은 고초를 격어시며 만난을 무릅쓰고 이땅에 자유민주국가를 건설해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신 이승만박사님과 자본적 자유민주정치를 해갈수 있도록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해주신 박정희대통령 등,

특히 두분에 대해서 독재자라고 폄하는 것을 일삼어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김대중 노무현" 을 칭송하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두눈 바로 달린 건전한 상식인으로서 참, 이해하기가 어렵다.

 

해방 당시 김구, 김규식, 여운형선생님 등, 우리민족끼리의 남북통일합작정부수립을 위해 애쓰오신

그분들 노력의 허무함이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공산주의자 김일성의 한반도 적화통일 노림수에 놀아난

우리민족끼리의 꿈이 사기기만으로 이제와서 보면 허구이었음이 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때 남한 만이라도 이승만박사님의 혜안과 선견지명으로 단독 독립국가로 탄생할 수 있었음은 시조이신

단군님 축복으로서 남쪽만이라도 복(福)받아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南韓국민 만의 크나큰 행운일 것이다.

 

우리가 건국대통령님께서 세워주신 이 나라의 "틀" 안에서 고맙게 살아가면서,

그분이 물려주신 유산으로 우리가 민주와 자유를 만끽하고 덕분에 지금까지 안정된 바탕에서 발전하며

잘살아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로 그분을 오늘날까지 폄하하고 씹어가며 위대하신

애국심을 욕보이고 우리가 그 은혜를 잊고 배신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오늘날까지 이어온 당시 복잡다난했던 그때 국내외에 처한 나라사정과 지금 우리의 현실을 똑바로 보고

역사의 사실과 진실이 뭣인가를 진정으로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보신적 있으십니까?

 

나무는 나이 태가 그 삶의 진실을 온 몸으로 자신이 살아온 역사를 말해주고 있지만 나라와 민족의 역사는 달리 엉뚱하게도 왜곡

굴절되어 후대에 그 역사를 잘못알게 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게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건국대통령님은 칠십평생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어린 나이에 해외에 떠돌면서 갖은 고난을 격으시고 일생을 나라위해 다받치신 분이시다.

그 고마운 은덕은 알려하지도 않고 일부 사람들은 공과를 묵살하고 그분을 무참히 짓밟음으로서 그래야만

자유민주투사라고 착각하여 즐기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네 현실입니다

 

"해방이후 그때 이승만의 대한민국건국과 강력한 카리스마적 반공정책이 없었드라면"

대한민국은 이미 벌서적화 (공산) 통일이 돼 지금쯤은 우리가 북과 같이 인민민주주의 (민중독재) (전체주의)

등, 세계최악의 야만 독재정권하에 말도 안되는 어린아이 밑에서 자유와 모든 걸 착취당해 일체의 사유재산권과 언로(言路) 없이 (지금 우리가 이북동포들을 보는 바와 같이) 노예같은 생활로 연명해갈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지금에 와서 누가 뭐래도 그분의 탁월한 지식과 혜안으로 그 당시 국내외의 험로를 뚫고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건국가로 잘했다는 것을 우리가 피부로 느끼며 지금 살아가고 있지않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일부사람들은 이승만을 독재라라 혹평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왜곡역사를

가르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뭘 몰라도 아님 잘알면서도 모른체해 한참 자가당착에 빠저 있는 것같습니다.

 

우리는 멀리 갈 것도 없고 그분이 만일 독재자라면 근세의 독재자들의 일생을 참고로 한번보십시다.

세기의 독재자들의 행각을 여기에서 일일이 다 쓸수는 없지만 독재자의 말로는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영화만을 위해 부정부패와 부정당하게 폭력으로 자유와 국민을 억압해 착취하고 혼자서 독식하며 그 말로는 모두가 똑 같이 비참했다는 역사적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패전후 사체로 발견(스스로 자살추정) 되었고 이태리의 무쏠리는 패전후 비참하게 전범

으로 처형당했다.

리비아의 카타피는 무참하게 사살되었고 이집트의 무라바크대통령은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떵떵거리던 이라크의 훗세인은 땅굴에 숨어 있다 체통을 꾸기고 미병사에 체포되어 사형집행당했다.

루마니아의 차우스체쿠는 반정부군에 처참하게 살해되어 그 인생과 정권은 종지부를 찍었는데!

동서고금을 통해 독재자의 말로는 자살, 타살, 사살, 처형 등으로 끝나는 운명들이었다.

 

또 이들은 한결같이 국민을 억압해서 나라의 발전과 국민의 삶은 뒷전이고 자신만히 많은 권력과 부를

혼자서 독식해 스스로 권위를 과시하고 사치행각과 비밀구좌로 사욕을 축척하고 온갖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러 국내외로부터 많은 규탄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이 사라진 독재자들의 한결같은 모습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독재자란 이승만은 4.19. 발생때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 한다" 란,

짤막한 한마디의 성명과 함께 누가 그만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자진해 자유민주를 신봉하는

사람으로서 국민의 지지가 없다면 권좌에 있을 이유도 없다며 아무런 미련없이 깨끗하게 본인의

의지(意志)로 그 자리를 그만두시고 자발적(自發的)으로 내려오셨으니 근본적으로 세기의 다른 독재자들과 같이 권력에만, 집착하지 않고 전연 비굴하지도 않으며 뚜벅뚜벅 걸으서 하야하시는 모습을 보지 않았나?

 

다른 독재자들처름 자리에 연연하면서 마음만 먹었다면 물론 군대를 동원해 당시의 데모(소요) 정도는 

가볍게 막을 수도 있었던 힘을 그때 갖고 있었지만 그분은 자기로 인해 국민간 충돌과 갈등을 원치 않했다.

부정에 항거하는 국민의 저항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릴 줄,

아는 것이 다른 독재자들과는 전연 딴판인, 자유민주주주의

思想家이시며 信奉主義者로서 그의 下野는 당당했다.

<세계 어느 독재자가 국민의 의견을 존중해 "국민이 원한다면하고 스스로 물러나서" 빈털털이로 돌아갔거나

편안하게 자신의 천수(天壽)를 다하고 자연사(自然死)한 예가 동서고금 어디 어느 나라에서 또 있었던가?>

 

당시 이승만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이제 나는 대통령이 아니니 관용차는 탈 자격이 없다하며,

해방후 적산가옥인 집을 국가가 사저로 주었던 이화장까지 걸어서 (집에 가겠다고) 고집불통이었다.

거리엔 성난 데모대가 으샤으샤하고 있었으나 조금도 위협에 구애 받지 않고 걸어서 나가는 의연한 모습에 당시의 과도(내각)정부 허정수반 억지로 차에 모셔 이화장으로 정중히 모든 관료가 배열해 배웅했다.

 

그때의 데모군중들도 하야해서 떠나가시는 이승만 탑승한 차, 주위에 모여서

박수를 치며 퇴장하시는 (老) 대통령을 위로하며 환송하고 격려했었다. 

하야직후 이승만은 4.19로 인해 부상당한 시민 학생 군경의 병원을 직접방문하여 자기의 부덕으로 인해

불행한 사태로 피해를 입은 분들께 사과와 함께 위로했고 그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시며 눈물을 보여셨다.

세계의 어느 독재자가 자신으로 인해 피해입은 사람들을 직법찾아가 현실을 직시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 (독재) 자가 세상 어디에서 그런 예를 보았나? 동서고금 역사에서도 그런 일은 없었다. 

이승만은 그 후 심신의 안정과 국내의 정치적인 상항을 고려해서 하와이로 떠나가실 때!

당시 4.19 직후 수립된 (허정과도내각정부)의 공항환송을 받으시며 미국을 향해 이 나라를 떠나셨다.

다른 독재자들은 끌거모은 재산을 갖고 국가와 국민을 배신하여 지 한목숨 살려고 비밀리 도망치기 바쁘지!

 

그 분의 사후(死後)에 남은 것이라고는 해외독립투쟁(긴독신)생활로인해 친자식 하나 없고 망영시절

독립운동에 사용하셨던 낡은 손 타자기 1대와 기워서 신고있었던 헌 양말 (프란체스카 영부인의 검소함으로 인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남은 것이란 (이승만박사님의 시신이) 그 위대한 일생에 초라하게도 전부였다,

 

蓄財를 위한 부정부패는 아예 그의 사전엔 처음부터 없었고 일부 대한민국의

후임 대통령들은 너무나 깨끗했던 그분 앞에서 자신들의 부정부패의 축재행위를

스스로 양심에 물어 선대 대통령과 국민 앞에 부끄러운줄 알고 속죄해야 한다.

하와이 미국생활에서 병원비와 생활고로 동포들의 도움으로 연명하면서 미안하니까 서울에 있는 딸랑

집한체까지 양도증릉 쓰주었으나 교포들은 그분을 존경해 순수하게 도왔음으로 양도증은 극구 받지 않았다.

(만일 그분이 독재자라면 망명지에서 교포들의 열열한 환영과 따뜻한 보살핌을 받을 수 나 있었겠나?)

 

 또한 이승만생전에 외국인으로서는 전례가 없었고 약소국가의 대통령으로서는

지금까지도 단 한번의 예가 없었던 미국브로드웨이에서 100만 군중앞에서 열열한

카프레이드의 환영을 받으신 분이다.

자유진영을 대변하는 자유민주주의 반공투사(反共鬪士)로서, 인정받아 미국인으로부터 영웅대접을 받은

단 한사람의 자랑서러운 "한국인" 이다.

우리는 그분의 고매한 일생과  自由民主主의 가치를 지향해 온것을 기억해야할 것이며 앞으로도 대한민국

지도자중 미국대중 앞에서 그런 열열한 미국가(美國家)의 환영을 받을 분은 아마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분이 만일 독재자였다면 특히 미국같은 民主나라에서 그런 환영 받는 일은 감히 있을 수 없다)

 

또 어떤사람들은 이승만을 뼈속까지 "친미주의자" 라고 비난하지만 절대로 그렇치 않다.

사실 이승만은 탁월한 그의 식견으로 미국정부의 허(虛)와 실(失)을 간파하고 미국의 힘을 우리의

국익을 위해 유리하게끔 적절히 이용하고 사용할 줄 아는 철두철미한 <용미주의자(用美主義者>

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당시 세계의 강국이나 약소국이거나 간에 어느나라 대통령보다도 외교적으로 미국을 꼼짝달삭

못하게 가장 잘이용하셨고 그분의 탁월한 지혜로 미국을 나름대로 항상 코를 잘 꿰신 분이시다)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박사님의 본관은 전주이시다.

1875년 04월 18일 (북한 황해도 평산) 에서 출생하셨고 1965년 7월 19일 (향연 90세) 에 서거하신,

이씨조선 양녕대군 (태종의 장남) 의 16대 손(孫)으로서 이씨(李氏) 가문의 6대 독자이셨으며-

 

그분의 출생은 王族이었지만 王政에 대해서는 비평적이었고

태어나실때부터 평등한 자유민주사상을 지향하신 분이셨다.

(그분께서는 배재학당.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바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를 졸업하시고

당시 조선 (대한제국) 사람중에서는 제일먼저 (1호로) 그 시대에 미국정치학박사를 받으셨다)

 

프린스턴대 총장을 지내셨던 우드르 윌슨(Woodrw Wilson)박사미국제 28대(1913~1921)

대통령을 역임하셨고 이 대학의 같은 출신인 이승만박사와는 각별한 사이로 윌슨대통령

"민족자결주의" 를 세계만방에 제창할 이승만은 그의 멘토역할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여권(旅券) 제 1호 발행자이시자 최초의 소지자로서,

우리가 일본에 강제합병되면서 다른 독립운동가들 처름 "무국자(無國者)"가 되어 해외에서

활동할 때 "비자문제" 로 다른나라 출입국에 많은 어려움을 격었다.

특히 미국비자를 얻지 못해 입국이 불가능할 때 "월슨" 은 이승만께 간단한 방법이 있지않으냐?

("미국시민권" 을 신청하라고 권했다)

이승만그건 말도 않된다며 거절하면서 "나는 이래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다. 어찌 남의 나라 시민권을 받겠는가?

 "윌슨" 은 이승만의 이 한마디에 큰 충격을 받고 국무성에 연락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재입국비자를 받도록 협조해 주었다.

 

당시 서재필박사 도산 안창호생님 등, 어지간하면 미국시민권을 받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았고

지금도 미국시민권을 받을 수만 있다면 받고저 하는 우리국민들은 아주 많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승만은 "월슨"의 미국 시민취득 권고를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과감히 거절했다. 

 

해방 당시 미, 쏘 양대세력의 냉전시대 우리는 그 미래를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암흑시대이었다. 

열강의 힘에 눌려 바람이 부는 되로 나라와 국민이 함께 이리흔들 저리흔들 아무런 비전과  나침판 없어

어느방향 어디로 가야할지 우왕좌왕하였고 또한 우리 내부에선 먹물께나 들었다고 잘난체하는 인간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다들 제 잘났다고 날뛰며 군웅(群雄)이 활거해 어중이 떠중이 때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답시고 애국한다며 민주다. 공산이다. 친탁이다. 반탁이다. 사공들이 많아 국가와 민족의

배는 산으로 갈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방향감각을 잃고 혼돈속에서 또 다시 일제침략과 같은 외세의 (침략)위협속에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암흑과 무척 혼돈의 시대로 우리의 처지는 불확실한 미래의 갈림길에서서 안개속 불안한 날의 연속이었다. 

 

대한제국멸망후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는 바같 세상에서 민주공산이고 뭐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알 수 없는 그의 무지(無知)하고 닫힌 귀에 요행만 바라며 힘있는 나라의 이 눈치 저눈치만 살피는

그런 형편이 계속되는 세월이었다. (구한말 왕정에서는 복종만 하는 것만 알았고  36년간의 일제 핍박에서는 반항할줄만 할줄알았지 자유민주주의가 뭣인지 전연 백지 상태의 대다수 무식한 백성들 뿐인 상황이었다)

 

이승만 그는 해외 망명에서 해방된 족국에 돌아와 외쳤다.

뿔뿔히 흩어저 있는 남북동포들에게 (우리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절규하며 외치던 때가

이 시대이었는데 그 유명한 말씀은, 당시 흩어저 (수많은 갈래로 분열되어) 눈치를 살피며 우왕좌왕하는

우리겨례와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그가 외친 이 말씀은 흩어진 양때의 목자처름 하나의 광명이었고 민족의

길잡이요 복음 같았다.

물론 그 당시 김구선생님과 김규식 여운형 등등의 기라성같은 사람들도 나라와 국민을

위해 나름대로의 정치적인 소신과 능력을 내보이시며 그들의 지지세력과 함께 맹열하게

정치활동을 하고 계시던 때다.

그분들은 세계의 정세와 현실은 도외시하고 물론 "공산주의 음흉한 혁명적 흉계를 잘모르면서

이상(理想)에 치우처" 공산당인 이북과 함께 손잡고 "통일합작정부" 를 남북의 우리민족끼리 힘모아

이루자는 꿈만으로 시대를 읽지못한 비현실적인 "남북의 합작정부로 통일이란 환상" 에만 젖어있었다.

 

(우리민족끼리 손잡고 통일합작정부란 좋은 꿈일뿐, 하나의 무지개와 같은 환상이 공산혁명에 통할리 없다) 

지금까지도 진보와 좌측에서는 그때 이분들의 정신을 기본적으로 계승한답시고 늘 나라의 이념과 여론을

옳바르게 이끌지 못하고 혼란을 갖게하고 있는 것의 현주소가 바로 여기서부터 싹이 턴 것같다.

 

난세에 제 나름대로 날고 뛰는 영웅호걸들이 서로 옳다고 목청을 높혔지만 그들은, 일찌기 눈을 뜨서 해외

유학정치학박사 1호인이신 이승만 만큼 세게의 흐름과 민주와 공산주의 사상을 꾀뚫어보고 앞날을 예지하는 능력이 이승만과 비교할 때 식견과 혜안의 차이가 있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세계의 흐름과

여러가지 정세를 판단하는 지식과 현실적 감각이 이승만박사님에 비해 많이 부족했던 것처름 보인다.

 

청년 이승만은 일본에 항거하여 반제국주의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투옥되어 6년간 참혹한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온 그해 1904년 11월 인천-목포-부산-시모노세키-고베-요코하마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긴항해 끝에 12월말 드디어 미국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대한제국의 마지막 고종황제의 밀사됨을 스스로 거절한 이승만은 민영환 한규설의 서신을

가지고 미국에 들어 와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열정적인 청원외교를 그때부터 펼첬다.

 

1905년 8월14일에 티오도로 루즈벨트 미 대통령을 당시 감리교 윤병구목사와 함께 뉴욕시 롱 아일랜드에

있는 루즈벨트의 별장 세거모거힐(Sagamore)을 방문해 면담하고 평화회의에 제출할 청원서를 제출했다.

 

2차대전 직후 전세계가 "공산주의의 환상" 에 빠저 공산주의에 대해서 자유진영에서 잘못알고 있었던 때!

소련공산주의의 침략적(혁명)정체를 냉철하게 미국정부에 알려 미국과 자유우방에 공산주의에 대한,

우호적인 꿈에서 깨어나게 끔, 경각심을 일깨우게 한 것도 이승만의 통찰력에 힘 입은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승만은 약소국가의 지도자로서는 아주 곯치아픈 존재인 것이 미국동부의 명문가 하바드프린스턴 출신의 정치학박사에 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때론 미국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고집불통인 그를 미국은 한때 쫓아내려고 했으나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이승만을 대체할만한 인물이 그 당시 한국정치계에서 미국이 보기엔 없었고 모두가 마땅치 못했다>

 

미국에서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을 할 때, 젊은 이승만의 슬픔은

제 나라를 지키지 못해 민족의 영혼을 일시적으로 상실한 모든 한국청년들의

자화상이고 아픔이었다.

이 땅에 自由民主主義는 "이승만" 으로부터 그 思想的

"씨앗" 이 완성되었으며 "이승만" 으로부터 大韓民國의

建國과 함께 共産主義를 배척하고 民主政府樹立의

正統性이 지금까지 우리가 목숨걸며 지키고 계승되어 오는

우리의 삶의 "틀" 이요 국가사회미래의 참된 삶의 가치다.

1945년 해방후 3년간 우리는 미군정청(美軍政廳)의 지배아래에서 정치적 통제(統制)를 받고 있었다.

당시 존 R. 하지 주한미군사령관 겸 군정청장(軍政廳長)과 이승만과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처름 껄꺼러운 사이로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설정문제를 두고 (신탁이다 반탁이다 좌우합작정부다) 아니다. 등등으로

사사건건 늘 미군정청과 충돌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미국무부의 정책에 따라 대한민국에 좌(공산진보) 우(민주보수) 등과 "합작정부"수립하려는 역할을 당시 "하지장군"이 본국의 지시로 악역을 맡아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박사님은 좌익(공산)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셨고-

그때 김구. 김규식. 여운형님 등은 (좌) (우) 합작정부 찬성함으로서 미군정청

하지장군과는 서로 의견 (배가) 맞아 그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구 김규식들의 주장대로 남북의 "(좌)(우)합작정부"가 미군정청장과 합의가 무럭익어갈 무렵!

 공산주의자들과 합작정부에 대해 우려했던 이승만박사님은 미국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자,

이승만은 이를 극복하고 바로잡기 위해 UN에서 우리나라 문제를 직접 논의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따라서1948년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정부가 국제사회승인을 처음받게 돼 그간 홀로 피눈물 나는 투쟁의

결과로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잃었던 나라를 다시 그분의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건국하게 됐다.

 

1948년 12월 12일 3차 유엔총회가 열렸던 프랑스 파리, 대한민국정부승인안이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로 통과 되다. (英, 美 등 찬성 48 個 國 / 소련, 폴란드, 우크라이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벨라루스 (6표) 반대 스웨덴 기권 1표로 UN에서 이승만의 노력이 이와같은

결실로 자유대한민국을 (탄생)하게 하는 것으로 가결되다.  

 

 당시 공산화의 길로 가고 있는 많은 유럽국가들을 지켜본 미국이 소련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

본격적으로 이승만의 반공(反共)로선에 따라 반공주의 정책으로 미국은 바꾸어 채택하게 되었다.

그때 이승만은 국내좌파들의 방해공작과 그시절에도 뒷털미와 암살의 위협을 강하게 느끼면서까지-

또한 발목을 잡고 너러지는 (김구 및 김규식) 등과 맞서 힘들게 견제해가면서 UN 과 미국을 상대해 그들을 공산주의의 위험에서 먼저 눈을 떠게해 모든 자유우방국가에서 (반공주의 정책으로 선회하게하였고)

우군(友軍)을 만들어 뜻을 성공했다 (이 많은 나라를 자기 편으로 끌어 드리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승만김구는 형님 아우님하는 절친한 사이로서 귀국초기에는 서로 순탄한 관계를

잘 유지했지만 우선 南韓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의 정부를 수립하자는 이승만의 현실적인 주장과 이북 공산당 김일성정부와 같이 남북이 합작하여 우리민족끼리 통일정부를

이룩하자는 (비현실적인 공산과의 합작정부환상에 젖은 이상주의적인) 김구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부닥치면서, 두 사람의 정치적 운명은 이때부터 서로 사상과 이념(理念)의

차이로 갈라서게 되었다. 

지금의 우리나라에 보수와 진보진영의 갈림길은 이 시발점을 원인으로 하여 지금까지 후대정치인들에게 까지 승계되어 온 것같기도 하다. 

 

당시 국민의 여론과 UN 및 미국의 지지도는 이승만의 반공(反共)로선을 지지하게 되었고 새로구성되는 

정부의 대통령깜으로서 이승만박사님이 1위의 선호도를 가젔으며 김구선생님은 그 다음이었다. 

1948년 7월 20일 이승만박사님은 김구를 누르고 "대한민국초대건국대통령"

되셨다.

 

<이승만의 업적은 너무 많아 여기에 다 기록할 순 없고 일부만 쓰보기로 한다>

 

1896년 ~ 협성회보주필. 1912년 ~ 셰계감리교회한국대표. 1917년 ~ 한인기독학원설립.

1919년 ~ 1925년. 상해임시정부 대통령. 1945년 ~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 1948년 제헌국회의장.

1948년 ~  (초대 건국대통령) 제 1대 대한민국대통령(1952년 ~  제 2대 대한민국대통령.

1956년 ~ 1960년 제 3대 대한민국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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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해방후 그간 일본에 수탈당했던 우리의 농지를 환원시켜 당시의 농민들에게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농민들에게만 농사지어 살수있도록 농지를 (골고루평등하게) 이승만은

땅을 성공적으로 분배해주었다.  

(이북이 오늘날 이렇게 잘못살고 있는 원인은 김일성이 당시 농지개혁실패로부터 시작된 결과일 것이다)

 

@ : 6. 25로 대한민국은 전쟁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황은 전쟁으로 인해 선거를 하지 않고도

대통령직을 비상사태에서 유지할 수 도 있었지만 직선제(直選制) 통한 민주선거절차

의해 제 2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취임하다. 

(그때 전쟁중이란 핑계나 이유를 내세워 선거없이 집권을 연장할 수도 있었지만 당당히 선거로 당선하다)

스스로 민주정치의 발전을 위해 또한 민주주의의 정통성 및 그 과정과 절차를 중시하여 당시 나라의

사정이 혼란서럽고 복잡다난하였지만, 그 어려운 때도 민선(民選)시행으로 민주실행하고 지켜나갔음.

 

@ : 이승만은 아군과 미국을 비롯한 UN 연합군이 잡아서 한국군 경비대와 UN 군, 관리하에 있었던 전쟁포로 2만5천명을, 휴전협상이 이루어 질 경우 북송될 그들의 운명을 예견하고 반공포로들을

대한민국대통령권한으로서 국가주권(主權)을 행사해 미리풀어주고 (석방)시켜주었다.

(비록 우리에게 총뿌리를 겨누어 적으로 포로가 됐지만 우리동포이니 자유를 주어야 허겠다고 이승만은 

결심하여 미국측과 UN군측에 일체의 사전 상의 없이 비밀리에 일방적으로 석방 작업을 하여) 당시UN 군,

관할밖에 있었던, 원용덕(元容德) 헌병사령관(중장) 에게 비밀지령을 내려 1953년 7월 18일 새벽12~05시에 절묘하고도 과감하게 반공포로들을 깜쪽 같이 대한민국대통령권한으로 석방시켜줬다. 

 

이때 이승만의 쾌거에 아군도, 적군도, 전 세게가 함께

깜짝 놀라! 어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미국과 유엔군들이 많은 죽음과 전금(戰金)을 쏟아부어며 전쟁포로로 잡아 공동관리 해온 것을,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우방연합국(友邦聯合國)의 지원으로 전쟁을 수행해 가는 처지에서 비밀리에

참전국을 배신하고 뒷통수를치다니? 누가 당신께 무슨 권한을 주어 당신 멋대로 석방했느냐? 고~

 

그 시대 세계를 쥐락펴락 하던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영국의 처칠수상 등, 강한 위협과 맹열히

비난하고 위압적 태도로 해명하라고 강력히 이승만요구해 왔다.

이때 이승만은 태연하게도 "당신들은 무엇때문에 한국전(戰) 에 참전하고 파평했느냐?" 고 반문하며,

그 것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가?"

나는 2만5천명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주기 위해 한 일이었다 라며, 그들의 추궁과 비난을 배짱있게

현명한 대답을 하며 자신 있게 참전국의 불같은 불만을 잠재웠다.

남의 도움으로 겨우 전쟁의 맥을 있고 있는 약소국 대통령으로서 감히 상상이나 할수있는 일인가?

세계의 어느나라 대통령이 이런 경우 뱃짱있게 행동할 수 있겠나!

 

@ : 바로 6. 25의 그 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이때도 이승만은 미국(UN) 등을 코를 꿰어 2억달러의

한국부흥원조와 한국지상군 20개사단 증강비 및 이때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을 이루고우리의 안보를 확고하게 보장받았다 또 전후복구를 위해 경제발전 밑거름의 원조를 확보해 주셨으며-

이때 이분의 외교적성과가 전후에 만신창으로 파괴된 우리나라의 안보와 경제발전기반을 조성해주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 대한 "기본틀" 이 되어주는 멍석을 깛아주셨고 민주정부를 이어가게끔하셨다.

@ : 이승만은 그 전쟁와 중에 세계가 정신이 없었을 때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52년 01월 18일 한반도와

그 부속도여를 기준해 평화선이라는 것을 (당시는 듣도 보도 못한) 바다에 선을

그어, 우리의 주권이라 선포하고 우리영토에서 해안으로부터 60마일까지 수역내에 모든 외국선박의 어업을 엄금(嚴禁)하셨다.

(이때 일본은 역내해상어업권을 잃고 심히 당황하여 이 평화선을 그들 나름대로 이(李)라인 이라고 불렀음)

당시 일본은 이승만대통령께 감히 항의도 못하고 꼼짝달삭도 할수없게끔 일본을 굴복시키고 압박하셨다.

 

이승만이 미래를 예견하는 탁월한 정치솜씨로 오늘날 이평화선 (전관수역) 이 우리국토를 넓펴주었고

우리국방의 안보및 해상경제의 막대한 부(富)와 영역을 후손들에게 자자손손 물려줄 수 있게 하셨다.

 

(김대중정부들어 일본과 어업협정시 독도내에까지 전관수역을 인정함으로서 다시 독도를 넘볼수 있게끔 일본에 구실과 별미를 주어 ( 지금의 분쟁에 씨가 되어) 안타까우며 감히 이승만정부시대엔 일본은 어떤 이의도 달지 못하고 무조건 승복하게 해 왔다)

@ : 제 1차 한일회담이 열리는 1952년 (11월) 만 해도 전후(戰後)의 일본은 무척 가난했다.

우리의 대표로 부임하는 헌법학자 유진오(兪鎭午)박사 등에게 이승만이 당부하기를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지배한 보상으로 당시의 돈으로 36억달라를 받아 내어야 한다며 강조하셨고

(그때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체 1억달라도 되지 못하는 나라 형편이었다)

후일 이승만의 평화선으로 인해 박정희정부가 한일회담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이 지금 우리경제

발전의 종잣 돈이 된 것도 다 이분이 앞날을 내다보시고 많은 보상액을 일본에 미리 압박해온 덕이다. 

 

@ : (당시 평화선을 그을 때 "독도" 를 우리 전관수역내에 두게하여 '물론 독도는 역사적 우리땅이지만,

이승만의 이런 조치로 인해 우리가 지금 독도를 우리 관할에서 대한민국이 먼저 (점유하여) 맘대로

편리하게 소유하게 되었다.

(이런 조치를 이승만이 할때 일본은 눈치를 살피며 "독도"가 지금처름 기네 땅이라고는 감히

입도 뻥긋 하지 못해 기정사실로 받아 젓던 것이다)

 

 @ :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해양경비대가, 328척의 일본배와 3,929명의 일본선원들을 나포하여 억류했고 나포한 일본배의 일부는 우리가 당시

배 건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경비정으로 개조하여 이승만은 이를 직접 사용하기도 했다.

아울어 이승만의 대 일본에 대한 이런 강경한 응징으로 인해 일본은 평화선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이승만시절엔 일본은 감히 평화선을 침범할 꿈도 못꾸고 평화선 도발을 일체 멈췄으며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감히 입도 달삭하지 못했다 (지금의 중국어선불법조업도 이 평화선 근거에 의해 규제하고 있다) 

 

이승만은 일본 및 타국에 대해 강력하게 우리의 "해상주권" 을 확보하셨고 "독도영유권" 도 확실하게 우리의 것으로 지켜내-

後代 막대한 富를 창출하는 해상영토와 그런한 역사를 포함해 우리에게 정말로 값진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신 분이시다.

@ : 또한 그 분은 전쟁(휴전)의 폐허와 후유증 속에서도 국가의 산업발전과 민생을 위해 충주비료공장,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 등을 만들면서 중화학공업발전의 토대를 마련해 주셨고

그 당시에도 미래의 에너지를 예견해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여 지금 세계적인 원자력국가의 도약에

이를 수 있는 과학기초를 우리에게 세워주신 (에너지)에 관해서도 앞날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보여주셨다.

 

@ : 1953년 인하공과대를 설립해 우리나라가 비교적 문과를 강조해왔던 전통을 바꾸고저 공업발전을

이룩할 수있도록 힘쓰셨으며~

전후(戰後) 처음으로 의무교육(義務敎育)을 실시한 분도 이분이시다.

초등학교가 전국에 당시 2800개에서 4600개로 증 신설하셨고 대학도 19개에서 68개로 늘렸고

중학교는 10배로, 고등학교는 3.1배로 늘려 나가시며 국민교육과 문화창달에 기초를 잡으시려 힘쓰셨다.

 

@ ; 당시우리 국민의 문맹율이 80%정도 이었는데 문맹퇴치운동을 벌려 1959년 22.1%까지 전국민 문맹율을 좁혀 나갔셨다.

@ : 또 전(戰) 후(後)에 그때 56종의 일간신문과 177종의 일간지를 포함하는 411종의 언론매체가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언론자유를 허용하고 보장해 언론창달에도 힘을 기울리시며-

나라의 발전을 위해 패허가 되었던 전후(戰後) 우리나라전반에 피해를 복구해가며 개혁을 실시하고

산업발전을 위해 戰後에 사막같았던 황폐한 우리 땅에 각분야에 걸처서 미래와 후대를 위한 산업의 기반적

(基盤的) 씨앗을 심어시고 일구어 내셨다.

그리고 자유당 이승만정부 당시 경제개발 3개년계획민주당의 4.19이후 공짜집권한 덕에-

매일 데모로 날이 새고 데모로 밤이 지는 데모만능주의로 당시 민주당(장면)정부가 너무 무능했다.

 

나라는 혼란서럽고 북은 위협하며 경제가 지극히 어려워 그때의 민주당정부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때!

1960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구테타가 일어 났다.

박정희정부가 경제개발계획으로 국가기반의 기틀을 잡아가려고 할 때 이승만이 수립해두었던 

당시의 "경제개발3개년계획"이 군사정부의 초기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큰 밑그림이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강경파들은 이승만 그 후(後)의 대비를 위해 장기집권할 목적으로

이기붕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하였고 이 부정선거의 원인으로 4. 19의거 일어 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자유당 이승만은 민주당의 신익희후보와 자웅을 겨루었으나 신익희후보가 선거운동 중 뇌출혈로 

갑찌기 自然 사망하는 사건으로 인해 이승만은 강력경쟁자 없이 이미 단독으로 당선됨과 다름이 없었다>

 

남은 후보 당시 조봉암겨루었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에 당연히 정정 당당하게 당선 되었고 

이승만개인은 부정선거를 해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었다.

이승만은 이기붕부통령을 당선시킬려는 부정선거와는 사실상 아무런 관련없이 당선될 수 밖에

없었던 그때의 선거상황이었음을 역사의 진실과 함께 당시에 아는 국민은 다 알고 있다.

그때의 부정선거는 이승만 사후 또는 후일 고령으로 인해 퇴진을 염려한 자유당 강경파들이 자신들의

계속적인 집권목적과 안위와 입지를 위해 이승만의 눈을 가리고 저질은 부정선거의 죄악이다.

 

이때 당시 야당 민주당에서는 "못살겠다 갈아보자!" 란 유명한 선거구호로 자유당을 압밖했고-

자유당에서는 "갈아봤자 별수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갈아봤자 더 못 산다." 라고 응수한 양당은,

너죽고 나 살자란 식의  각박한 지금 우리정치와 확실히 다른 여유와 멋이있었고 서로

정적간에 대포도 한잔  나누는 情이 있었으며 서로가 인정하면서 소통하는 여유와 

유어머있는 정치적인 낭만도 있었던 좋은 정치적 계절이었다.

(그때의 정치양상과 지금의 여야정치형태를 비교해보면 현재정치행태는 삼류정치(3流 政治)라 할수밖에-

이때 돌아가신 신익희선생님을 생각하시며 비내리는 호남선유행가가 그시절 시작해 한창 불리게 되었지!

 

그분은 개인적인 부귀영화엔 전연 관심이 없었고 그 분의 평생은 오직 대한독립과 나라와 민족의 발전과

오로지 멸공(滅共) 통일을 위해 청년시절부터 타국을 떠돌며 독립투쟁을 해온 일생이다. 

<우리민족이 전연몰랐던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심어시고 세계 최초로 자유진영에서 공산주의와

대결해가시며 6. 25전쟁을 승리로 이끓어 내시어 국가와 국민을 끝까지 死守하며 지켜내신 분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세우시고 민주정부의 전통을 확립하시며 국민과 나라의 발전초석을 튼튼히 해 우리에게

"자유" 와 함께 민주주의 정부를 모든 국민들이 어어갈수있게끔 나라의 기반을 딱아 물려주신 元祖이시다.

그런데 누가 있어 그분의 진정한 업적과 애국심을 알기나 할까?

그때 우리나라의 그 빈 자리에 만일 이 분이 없었다면 (또한 김구선생님) 같은

사상을 가지신 분만 계셨드라 지금의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지금의 북측 태도를 유추해 볼 때 감히 우리민족끼리의 남북합작정부가 성공할

수 있었을까? 백발백중 당시의 김일성에게 먹혔을 것이다.

그때 이승만의 구국(求國)의 결단으로 미국과 세계(UN)의 지지와 도움을 받아 내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국가건설로 우리가 독립할 수 있었음은 우리의 행운이고 크나 큰 축복이 아닐수 없다. 

나라를 세우시고 제일먼저 국가(국민)의 안보를 확보해서 확고히 해주셨고 나라의 영토를 넓혀주시며,

국방, 정치, 외교, 나라의 경제기반구축, 교육,문화, 과학, 언론 등, 건국초기에 6. 25의 전쟁을 격으시면서도

國基의 주춧돌을 하나하나 깔아주셔서 後代가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해갈수있도록 유산

(遺産)을 우리에게 물려주셨으니 나는 이 분을 존경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호랑이도 죽을 때가 되면 제 굴을 찾아 간다하며 하와이에서 귀국을 고려하시다가 1965년 7월 19일

한많은 그분의 일생도 마감하시며 서거한 후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 오셔서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시고

한줌의 흙으로, 국가와 민족만을 생각하시다 개인의 부귀영화는 전연모르고 고단한 세월속에 돌아가셨다.

 

근래까지도 (진보) 와 (종북성향) 의 정치권 및 사회시민단체 등, 오늘날까지 그들이 존재하고 있을

수 있었던 것도, 또 큰소리치며 마음대로 사는 것도 다 이 분이 자유민주주의 멍석을 깔아준 덕분이다. 

떡하면 지금도 민주화를 위해 투쟁들 한답시고 그럴듯하게 포장을 해서 그의 매일 법석을 떨고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민주화야 말로 이미 대한민국건국초기부터 실현되어 있었든 게 현실이다

자유민주 원조(元祖) 앞에서 번데기주름잡는 것도 유분수지 민주화한다며 눈가리고 아웅하는 진보 패거리

들의 작난 (폄훼 선동. 데모) 질은, 이제부터 명분을 선별해 책임있는 행동을 할줄 알아야 한다. 

보수는 부패로 흐무러지기 쉽고  진보의 타락과 부정부패는 국민과 나라를 더 멍들게

하여 자칫하면 파멸의 길로 정치가 나라를 이끌어 가기가 쉽다.

6.25 전쟁으로 인해 괴뢰군으로 부터 남으로 밀려내려가면서 까지 그 어렵고 힘던 때도 당시의 국회를 전쟁중이라는 핑개로 해산하지 않고 피난살이 중에서도 대구의 문화극장, 부산의 부산극장, 경남도청내에 있는 건물 등에서 임시국회로 사용하게끔 하면서 까지 국회를 존중하고 지켜주시며 민의를 대변하게 하신 뼈마디 마디 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온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이시다. 

그 분이 지금까지도 남 북 동포들에게 땅속에서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는 말씀에 살아있는

자들은 귀기울려 명심해 들어야 한다.

우리남북동포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왜첬던

그 절규에!~~~~~~~~~~~~~~~~~~~~~~~~~

지금의 우리국민 일부는 나무에 근본인 뿌리는 보지않고 무시하고

어찌 그 잎만 좋다하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가?

(광화문 일번지에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님의 동상이 건립돼 있어야함은)

역사의 순리에 맞고 타당해 그것이 나라와 민족의 긍지이고 정당한 국가의 자존심이 될 것이다.

따라서 民族의 精氣와 良心에 물어 建國大統領님의 銅像을 세워야 한다.

또한 독도에도 이승만동상을 세워 일본이 기겁을 해, 독도를 다시는 넘보지못하게끔 일본을

가르키며 바라보는 넘넘한 이승만동상을 독도의 수호신으로 우뚝 세워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돈에도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국대통령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당연히 들어있어야만

대한민국의 체통은 물론 나라의 근본적인 윤리와 기본적인 질서가 바로 잡혀가지 않겠는가?

 

나라의 先烈분님들을 비롯해 어른과 家長을 잘섬기지 얺은 곳엔 항상 패륜적인

것이 어른 노릇을 해 국가 사회 가정 학교 직장 등등, 결국은 亡兆가 들어 그 나라와

그 집안 꼴이 잘되는 걸 보지 못했다. 

 

건국대통령님께서 비록 저승에 가셨드라도 그 분의 나라 위한 독립투쟁과 광복은 아직 끝나지 않으셨다.

그 분의 생전 소원대로 한반도가 완전 멸공되고 남북이 대한민국으로 통일 된 것을 앞으로 늦어도

6~7년이내 보실수 있어야만 지하에서 대한독립만세 만만세 하시며 그때 가서야 눈을 편히 감으리!........ 

(이글은 저가 알고 있는 범위와 사실안에서 쓴글이지만 혹 넷 여러분님과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태극기의 유래와 의미에 대하여..꽃 피우는 아이 - 김민기

  (저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세계어느나라를 가봐도 그 나라 건국대통령의 기념관 및 동상과 돈에 우뚝서 있다)

독도 리앙쿠르섬의 항공사진한반도의 모양은 토끼를 닮았습니다.

우린 왜, 없는가? 왜, 그러지 못하는가? "독재자라꼬" 누가 같다 붙친 이름인가? 잘못된 역사와 (진보)가? 

이북을 건국한 김일성일가의 동상과 궁전(기념관)은 가는 곳마다 이북에 깔려있다.

사상은 달랐지만 같은 민족이 같은  건국인데 우린 왜 역사를  이북보다도 바르게 세우지 못하나??? 

세계에 유례없는 독재자요 왕조인 이북은 심지어 김일성 김정일의 미이라까지 만들어(보관) 과시하고 있지않은가...

2015. 08. 15.

(광복절 70주년 동터는 아침에)

                                                                       -남경-